[특별기고]
포비아(phobia)는 공포증으로 번역된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하는 질병 중 하나다.
요즘 ‘조현병 포비아’ 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조현병 환자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폭력적인 행동 그리고 범죄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불안을 느끼고 있는 현실을 일깨운 것 같다.
정신분열병이라는 병명이 부정적으로 들려서 조현병으로 개명했는데 포비아까지 겹쳐서 회자되면서 점점 증폭되는 불안을 어떻게 다스릴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사실 소수가 되어 본 사람은 다수의 편견이 얼마나 차가운 칼날인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자꾸 말하다 보는 중에 한가지 실낱 같은 희망을 봤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현재의 불안을 스스로 공포증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고소공포증·거미공포증·폐쇄공포증 등 모든 공포증은 특정 대상을 직면해서 생기지만 비합리적으로 과장된 공포·불안을 느끼듯이 우리 스스로 공포와 불안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이라고 믿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것이 병이라는 우리 스스로의 인식이 치료의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이 그 대상인 조현병 환자를 잘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
반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전체 인구의 1%를 차지하는 조현병 환자를 자주 보고 오랫동안 주치의로서 지내면서 꽤 오랜기간 병의 경과를 목도한다. 이런 경험 중 가장 하고픈 말은 이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첫 발병 때 환자가 경험하는 혼란과 비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보이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은 일견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남을 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병(病) 때문에 생긴 피해사고로,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자기방어적 행동이기에 먼저 공격하거나 집요한 추적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빨리 병원에 와서 진단받고 약물치료를 즉시 받는 다면 이런 행동이 나타나는 기간은 몇 주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급성기가 지나면 대부분 환자의 인생은 권태롭고, 외계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며,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질병의 중후반기를 맞이하게 된다.
급성기 혼란스러운 모습을 양성증상(陽性症狀) 뒤의 권태로운 시간을 만드는 것을 음성증상(陰性症狀)이라고 하는데 첫 발병의 경우 양성증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후 재발만 없다면 위험할 리 없다. 실제로 각종 범죄통계를 찾아봐도 조현병 환자의 범죄률은 전체 범죄, 흉악범죄 모두 병이 없는 일반인의 경우보다 매우 낮다.
"편견에서 출발해 낙인 찍는 사회 분위기, 회전문 현상 등 바람직하지 않아"
사회적 낙인(social stigma)이란 편견으로부터 나온다. 또 낙인은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즉, 모든 문제는 편견으로부터 나오는데, 편견이란 나와는 다르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부끄럽고 해롭기까지 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될 때 만들어진다. 타인과 섞여 사는 도시 환경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바쁜 현대사회의 삶이 편견으로 시작해 낙인까지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낙인 찍힌 정신질환자만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병을, 공포증을 만들어 준다.
정신의학 역사를 돌아보면 불행히도 정신질환자는 치료보다는 관리의 대상이었다. 안타깝게도 가장 복잡한 장기인 뇌로부터 기인하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어려우니 늦었을 테고, 늦게 개발되고 과도기를 거치면서 온갖 사이비과학으로 인한 오염을 가장 많이 받은 분야가 정신의학이다. 의학적인 규명이 늦어지면서 환자들은 치료가 필요함에도 벌을 받듯이 감금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1950년대 정신약물 개발은 정신질환이 다른 질병처럼 치료될 수 있음을 보여줬고 원인을 밝히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정신질환자는 환자로 편입되고 정신과의사는 의사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입원이 장기화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었다. 돌아온 지역사회에서는 무서운 편견과 사회적 낙인이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형성된 편견과 사회적 낙인은 이웃의 공포와 맞물려서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저항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퇴원하면 집에 갔다가 지역사회 냉대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소위 '회전문 (回轉門) 현상'이 생겼다.
다행히도 외국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다각적인 설득, 시설의 확충 등으로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의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과정을 겪은 나라들의 성공사례가 이 길로 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개정된 정신건강법이 오히려 환자 인권 침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초래"
최근에 우리나라는 정신보건법을 개정했다. 용기 있는 시도이고 누군가 말만 하던 일에 가시적인 변화를 만든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2016년도 개정된 후 그간 법 시행을 경험하면서 점점 회의감이 든다.
첫번째 환자의 인권이 신장되지 않았다. 권리가 신장되면 궁극적으로 환자가 행복해져야 할 텐데 더 두꺼운 편견의 벽에 갇히게 됐다. 개정법 이전에는 OECD 회원국과 비교해서 장기입원이 너무 많고 환자의 의사에 반한 강제입원은 너무 많았는데, 이것이 해소됐다고 통계 숫자를 보면서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쓸데 없이 까다로운 입퇴원 절차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침해되면서 치료를 받지 못해 병들 텐데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통계 숫자가 국가 순위를 향상시킨다고 환자가 저절로 낫고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두번째로 탈수용화로 가는 길에서도 더 멀어졌다. 개정 법률의 시행 이후 사회 여기저기에서 일반인들의 공포증을 만들어내는 정신질환자 관련 사건, 사고가 너무 많아졌다. 입원을 도와주기 위해 현장에 도달한 경관이 순직하고, 의사는 정신과 환자가 휘두르는 망치를 맞아서 다쳤다고 하니 일반인들은 더 불안하다.
이로 인해 환자를 따뜻하게 맞이 해줘야 할 이웃들이 환자를 포용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선 어떤 제도의 개혁도,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지역사회에 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필요한 인원을 확보한다고 해도 그 막대한 예산이 효과를 낼 수 없다.
조현병 포비아와 같은 사회병리가 퍼져나가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결국 우리는 법을 개정해서 얻으려는 두개의 큰 목표로부터 더 멀어졌다. 더 늦기 전에 초가삼간을 태우는 한참 엇나간 현재 정신건강복지법을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좀 더 추세를 보고 싶다면 파국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과 같고, 그 결과 가야 할 길에서 멀어져 영영 정신건강 후진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http://www.dailymedi.com/detail.php?number=83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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