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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사설 & 인터뷰

갑질 고객에 되살아난 ‘무서운 아빠’의 기억 - 2021-09-04 18:15 한겨레S

by pockey 2021. 9. 29.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감정노동자의 트라우마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센터 직원
‘진상 고객’ 만난 뒤 공포 시달려

예기치 못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는 동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민아씨는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 센터에서 고장난 제품을 수리하는 일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일이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잘 수리된 전자제품을 고객에게 돌려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면 힘이 났습니다. 고객 응대도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를 마쳐야 해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잘 적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센터에 찾아왔습니다. 민아씨는 며칠 전에 찾아와서 구입한 제품이 작동이 안 된다고 화를 내고 간 그 손님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문제는 그 고객보다 먼저 온 고객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예상보다 대기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아씨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질 고객 공포에 얼어붙어

 

결국 그 손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손님이 민아씨에게로 다가오자마자 갑자기 책상에 제품을 쾅 하고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당장 환불해, 시간 낭비가 벌써 얼마야!” 센터 내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했습니다. 민아씨는 마음속으로는 “죄송합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식은땀이 나면서 실제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민아씨가 경황이 없는 동안 다른 직원들이 와서 민아씨 대신 사과를 하고 손님을 응대했습니다. 손님은 돌아서면서도 “월급을 받았으면 제대로 일을 해야지”라며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손님은 이전에도 제품에 문제가 있다며 센터 직원들에게 반말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민아씨는 집에서 하루 종일 울었고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겨우 출근할 수 있었습니다. 대기표를 들고 자신의 앞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을 보자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눈을 맞추기 어려워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점장이 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민아씨, 몸이 어디 안 좋아? 어제 그 일 때문이지? 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진상 고객’들을 만나게 되어 있어. 나도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이제는 무뎌졌어. 힘내.” 민아씨는 그 이야기를 듣자, 다시 ‘그런 고객’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습니다. 문을 열고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손님을 보고 어제 화를 낸 그 손님으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근무를 할 수 없어서 병가를 내고 결국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민아씨와 같이 고객을 응대하면서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감정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민아씨가 하는 전자제품 수리는 고객을 돕고, 회사 입장에서도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업무입니다. 민아씨는 당연히 자신의 직업에 대해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손님이라고 해도 공개적으로 화를 내고 면박을 주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민아씨는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민아씨의 아버지는 자녀가 밥을 남기거나 방을 어지럽힐 때 매를 들었습니다. 한번은 어릴 때 아버지가 사온 카메라가 너무 신기해서 가지고 놀다가 바닥에 떨어뜨려 망가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민아씨는 다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아버지에게 맞았습니다. 민아씨와 오빠는 항상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저녁때 아버지가 오기 전에 집 안을 정돈하고 물건을 치웠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있지만 저녁만 되면 집 안을 정리합니다. 집 안에는 창틀에 먼지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모든 물건이 정확하게 각 잡혀 놓여 있습니다.  

 

민아씨는 그 손님에 의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마치 오늘 있었던 일처럼, 무의식중에 어릴 적 기억이 재현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을 못한다며 화를 낸 그 손님이 마치 자신의 아버지 같았습니다. 스스로 어린 시절의 부모님이 되어 민아씨 자신에게 야단을 칩니다.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과 불안을 만듭니다. 민아씨는 다른 손님들만 봐도 다시 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심한 두려움이 듭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민아씨는 누군가에게 비난받으면, 스스로 어린 시절 부모님이 되어 자신을 야단치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릴 적 엄격했던 아버지 트라우마

감정 드러내고 동료 지지도 필요

 

동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말은 부드럽게 전달이 될 때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변화하게 됩니다. 민아씨처럼 예민한 분들에게는 더 그래야 합니다. 무례한 손님의 행동이 민아씨에게 더 많은 실수를 유발하고, 민아씨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이런 손님들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점장의 대응도 문제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그 손님에게 주의를 주고 민아씨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런 손님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대응을 하면 또 그런 일이 생깁니다.  

 

민아씨는 자존감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 손님은 민아씨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계속 그렇게 행동해왔을 것입니다. 센터의 점장이나 직원들도 성실히 일하는 민아씨를 자랑스러워하고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민아씨는 과거의 기억의 고리를 끊고 현재만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수리 서비스로 고마워하는 손님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예기치 못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는 동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동료에게 밖으로 드러내고 서로 위로해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해결이 안 되고 지속적인 우울감과 모멸감이 들고 분노가 생긴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0447.html#csidx78b5594c9119c8bba9567996b53f821

 

갑질 고객에 되살아난 ‘무서운 아빠’의 기억

[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감정노동자의 트라우마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센터 직원‘진상 고객’ 만난 뒤 공포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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