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우리 병원에 어인 일로….”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 권준수 교수는 살짝 열린 문으로 고개를 밀어 넣은 30대 여성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성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선생님 맞네요. 병원에 화상 성형수술 받으러 왔는데, 지나가다 진료실의 이름표 보고….”
20여 년 전 어느 날 진료실에 불쑥 찾아온 ‘불청객’은 권 교수가 5년 전 전공의 때 경기도의 한 정신병원에 파견 가서 치료했던 알코올중독 환자였다, 술을 마시다 불이 붙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삶의 기력을 잃고 입원해있었던 환자. 권 교수는 환자의 증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고 삶의 의지가 강해진 것을 확인하고 퇴원시키려고 했지만, 병원은 보호자와 연락이 안 닿는다며 퇴원을 막았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 책임이 돌아온다며. 병원은 정부로부터 무연고 행려병 환자의 진료비를 지원받으므로 내보낼 이유가 없었다.
‘젊은 의사’는 병원 측과 며칠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퇴원 뒤 생기는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고 가까스로 환자를 퇴원시켰다. 권 교수는 이 환자를 비롯해서 몇 명을 의사가 아니라 보호자로서 각서를 쓰고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때 그 환자가 ‘혹시, 그 의사가…’하며 진료실 문을 두드렸던 것. “선생님 덕분에 퇴원할 수 있었어요. 혼자 살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굴의 화상, 수술하러….”
권 교수는 환자를 볼 때 이처럼 의사의 순간적 결정이 환자의 증세뿐 아니라 삶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고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허투루 하지 않는다. 늘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면 일부러 화 난 것처럼 환자를 대하기도 한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권 교수의 평판을 찾아보니 ‘친절하다,’ ‘기적같이 치료해줬다’ 등 감사의 표현이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착하다’는 평판까지 있었다.
권 교수는 전공의 때에는 알코올중독, 우울증, 어린이 정신장애 등 각종 정신질환을 치료했지만 전임의 때부터 주로 조현병 환자를 보면서 환자의 권익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환자와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정신분열병으로 불렸던 병명을 조현병으로 바꾼 것도 그다. 권 교수는 또 국내 처음으로 강박증클리닉을 만들어서 이 병 환자들에게 빛을 주는 의사다.
권 교수는 어쩌면 선친의 희망에 따라서 천주교 신부나 법조인이 될 뻔 했다. 그러나 권 교수가 초등학생일 때 대구 반월당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선친은 억울하게 장물아비로 몰려 구속됐다. 검사는 죄를 인정하면 구형량을 줄여주겠다고 했고, 면회 온 신부는 적당히 인정하고 빨리 감옥에서 나오라고 권했다. 선친은 타협을 거부했고, 형량을 채우고 출소한 뒤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직업’을 권했다. 부자(父子)는 그 것이 의사라고 믿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반골 기질 때문인지 권 교수는 약자인 환자를 먼저 생각하고, 권위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다.
권 교수는 대구 계성고 2학년 때 MBC 장학퀴즈가 그해 서울대 계열별 수석합격자 배출학교 후배 1명씩을 출전시키기로 하자, 엉겁결에 ‘선수’로 뽑혔다. 교장과 교사들에게 ‘저는 상식 없는 그야말로 몰상식한 학생’이라고 하소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퀴즈에는 자신이 없는데다가 MC 차인태 씨가 권 교수를 보자마자 “계성고는 건달 학교인데…”하며 농을 치는 바람에 기가 눌려서 퀴즈 질문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좀 들릴 때에만 부저를 눌러서 맞췄더니, 아뿔싸, 감점이 없는 바람에 주(週)장원을 했다. 월장원전에 참여해서는 질문이 들려서 열심히 부저를 누른 결과 장학 퀴즈 역사상 최저점에다가 1등과 최다 점수 차 탈락이라는 ‘불명예 2관왕’을 차지했다. 그때 어설프게 알면서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뼛속에 새겼다.
권 교수는 퀴즈대회에 참가하려 처음 서울역에 도착했던 밤, 휘황찬란한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빌딩)을 중심으로 한 야경에 압도당해 넋을 잃었다. 서울대 공대에서 주최한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해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인지 절감했다. 인재들이 모이는 거대한 도시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선친은 “의사하려면 경북대를 나와야지 웬 서울?”이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권 교수는 가출해서 두 달 동안 친구 권기형(전 우리은행 고문)의 집에서 기거하며 공부했다. 예비고사는 망쳤지만 본고사에서 만회해 가까스로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자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권 교수는 그렇게 진학한 의대를 졸업하지 못할 뻔 했다. 예과 때에는 의대 운동권 동아리인 ‘동의학연구회’ 활동에 매달렸고 본과1학년 때 전두환 정권이 휴교령을 내리자, 학교를 자퇴하고 유학 갈 계획을 세웠다. 성산 장기려 박사의 아들이었던 지도교수 장가용 교수가 진득하게 말리지 않았다면….
권 교수는 인문사회학에 대한 관심에다가 ‘동의학연구회’의 지도교수 이부영 교수의 영향을 받아 정신건강의학과로 진로를 정했다. 이 교수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정신요법을 우리나라에 도입했고 문화정신의학을 꽃피운 지성인.
권 교수는 전임강사 때 연구보다 행정업무에 집중돼 있는 현실에 실망해서 스승에게 사직 의사를 밝혔다. 스승은 “너를 교원으로 추천한 내 얼굴을 봐서라도 2년은 있어달라”면서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국제질병 분류(ICD-10)의 정신병 분류 타당성 연구 프로젝트를 따왔으니 이 연구를 마무리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권 교수는 그때 전국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들을 면담하며 의견을 정리해 작성한 논문을 국제학술지 《악타 사이키애트리카 스칸디나비카》지에 발표했고, 이후 사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400여 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권 교수는 1996~1998년 하버드 의대로 연수를 떠났다. 전임강사 때 국내에 정신분석학을 보급한 또 다른 인문학적 정신의학자 조두영 교수의 지시로 전공의 수련과정을 체크하려고 갔다가 유심히 봤던 로버트 맥컬리 교수에게 연수를 청했고 흔쾌히 수락받았다. 맥컬리 교수는 꿈이 REM 수면의 결과라는 ‘홉슨 맥컬리 이론’을 창시한 세계적 의학자였다. 권 교수는 맥컬리 문하에서 자기공명영상촬영(MRI),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등의 영상을 통해서 뇌의 세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발을 들였다. 당시 하버드대와 MIT가 이 분야 초기연구를 시작할 때 선구자 그룹에 합류할 기회를 잡았던 권 교수는 귀국하자마자 서울대병원에 이미지연구소를 세팅하면서 맥컬리 교수와 연락하면서 논문을 썼다.
그는 1998년 MRI에서 뇌 투명사이막공간의 이상이 조현병, 정서장애, 정신분열형 인격장애 등과 관계있다는 연구결과를 《미국정신의학지》에 게재했으며, 이듬해에는 뇌 왼쪽 옆 평면이 쪼그라든 것이 조현병과 연관된다는 발견을 《일반정신의학아카이브》에 발표했다. 또 뇌파의 일종인 감마파에 이상이 생기면 정신분열병이 생긴다는 것을 입증해서 《일반정신의학아카이브》에 발표했다. 미국 UCLA의 세계적 뇌 과학자, 마이클 그린교수는 권 교수의 논문을 읽고 “이 연구는 뇌신경과학에서 기초연구가 임상연구에 어떻게 적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는 연구”라고 코멘트를 달았다.
권 교수는 귀국 후 자신의 진료에만 집중할지, 영상연구를 통해 국내 학문 저변을 확대하는 것에 전력할지 고민하다 뒤의 길을 선택했다. 동료의사들과 함께 연구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곧 환자의 진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권 교수는 4년 동안 발품을 팔아서 2002년 대한뇌기능매핑학회가 출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 학회가 세계 학회를 서울로 유치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을 인정받게끔 성장시켰다. 권 교수는 또 2004년 조현병 조짐이 있는 청년 200명의 영상, 진단기록 등을 확보해서 경과를 관찰하는 아시아 최대 조현병 코호트 연구 ‘서울 유스 클리닉 프로젝트’를 출범시켜 각종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권 교수는 같은 병원 김세현, 윤제연, 분당서울대병원 김의태, 양산부산대병원 이태영 교수 등 제자들과 함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구결과를 잇따라 내놓아 학회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정신의학 권위자들과 협력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권 교수 팀은 국제뇌연구협의체 ‘이니그마(ENIGMA)’ 컨소시엄에 26개 연구진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으며, 지난해 3월엔 컨소시엄의 환자들을 분석해 강박증 환자는 정상인과 뇌 발달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혀 《브레인》에 발표했다. 팀은 또 2020년부터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아 예일대 스콧 우즈 교수가 이끄는 대규모 ‘정신병-위험 결과 네트워크 연구’에서 세계 27개 기관의 하나로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2개 팀이 참가하고 있는데, 중국 상하이대는 미국 교수들이 이끌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권 교수 팀이 아시아 대표인 셈이다.
권 교수는 이런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아산의학상, 분쉬의학상, 애에밀폰베링 의학대상, GSK학술상 등 숱한 상을 받았으며 국제정신약물학회 평의원회 위원, 국제조현병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권 교수는 정신질환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가야 환자도 제대로 치유할 수 있으며, 피해도 줄일 수 있다고 믿기에 진료실과 연구실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그는 2008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으로서 ‘정신분열병’의 낙인 효과 때문에 환자가 치료를 꺼리는 현실을 극복하려고 ‘조현병(調絃病)’이란 새 이름을 지었다. 당시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 동행’에서 환자와 가족 4000여명이 비인권적인 병명 개정에 대한 청원을 하자, 이에 적극 응해서 이름을 바꾼 것.
2017년에 정신질환자 입원을 어렵게 만드는 정신건강복지법이 통과하자, 이의 문제점을 알리고 개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권 교수는 “일부에서 자꾸 환자 인권을 강조하는데, 병에 걸린 사람의 인권은 빨리 치료해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제대로 보호하는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정치권과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졸속 입법의 부작용으로 2019년 경남 진주아파트에서 5년 동안 조현병 치료를 받다가 치료를 중단한 안인득이 대형 사고를 냈다. 형이 입원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법 때문에 실패한 뒤 23명의 희생을 내고야 만 것이다. 권 교수는 또 2018년 말에 강북삼성병원의 임세원 교수가 환자의 칼부림에 세상을 떠났을 때 의사를 보호하는 ‘임세원 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권 교수에 따르면 아직 조현병의 완전한 치료에는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완치를 위한 세계 각국 의료진들의 노력이 쌓여 목표점을 향하는 걸음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유전자, 뇌영상 연구에 인공지능(AI)의 분석을 더하고 있어 조현병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권 교수는 동료 의학자들과 이 연구흐름에 기여하면서, 당장은 하루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환자와 가족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면서 사회의 편견을 줄이기 위해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조현병의 맞춤치료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지금도 조현병은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관리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병입니다. 옛날과 달리 좋은 약이 많이 나와서 병이 너무 오래되지만 않았다면 약 부작용이 거의 없습니다. 제 환자 중에서도 사회 각계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문제는 환자 임의대로 약을 끊고 치료를 중단해서 재발하는 것이지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가 이 병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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